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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 청송의 독립운동사 21. 남석우南錫佑 : 1869. 5. 12~1933. 1. 31. 1906년 정용기鄭鏞基는 경북 영 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였다. 이때 남석우는 정용기의 휘 하에서 영양·봉화를 담당하여 의병운동의 지역적 확산에 일익을 담당하 였다. 또 그는 이 지역에서 이세기李世紀와 더불어 유기적 활동을 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下卷 39쪽,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0· 351·352쪽. 22. 남석인南錫仁(이명; 禹八) : 1878. 4. 12~1907. 9. 15. 을사조약이 늑결 되고 정용기鄭鏞基는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였다. 그리 고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중들에게 돌려 애국심을 고취시키 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보내어 의병에 입진할 것을 권유하 였다. 이때 남석인은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용상林龍相·심일지沈一之 등 과 함께 청송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 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 촌인 정사홍鄭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거의한 정사홍‧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 그리고 남석인의 육촌 되 는 남석문南錫文 등은 1906년 음력 4월 12일 출전하였다.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영덕 청연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여기 에는 이미 경주사람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절에 머 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 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의진 을 재정비한 후 4월 26일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玉洞으로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