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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 청송의 독립운동사 16. 남복수南福洙(이명; 洙卜) : 1880. 5. 9~1931. 1. 24. 남복수는 산남의진 山南義陣에서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여 조달하는 등 헌신적으로 투신하였 다. 한편 입암立岩·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抗日義兵將列傳(金義煥) 97-105쪽, 山南倡義誌 上卷 3쪽, 山 南倡義誌 下卷 58쪽, 山南義陣遺史 475쪽. 17. 남상현南相鉉 : 1861~1941. 1. 18.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 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데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이때 남상현은 서기書記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 河洛義陣과 연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 과를 올렸다. 이어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 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청송의진 좌익장 권성하 등이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18. 남석광南錫光 : 1881. 2. 22~1952. 1. 6.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산 남의진山南義陣의 기치를 들자, 남석우南錫佑·남석인南錫仁 등과 같이 입 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7일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 기을 비롯한 중군장·참모장 등이 일시에 순국하자 청송에 돌아와 다시 서종락徐鍾洛 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의진의 쇠퇴로 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