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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 청송의 독립운동사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김진구는 1896년 4월 참가하여 현서縣西 외방장外防將에 선임되었다. 현 서는 청송의 외곽지역으로 의성 및 신녕新寧과 인접해 적군 침입의 관문 에 해당하므로 특별히 그를 이 지역의 외방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이후 청송의진은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주변의진 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筆寫本), 靑松郡誌(靑松郡誌出版所, 1937) 坤卷 47쪽, 義城金氏世譜(1982) 卷之四 30쪽, 靑松義兵戰蹟紀念碑文(1982). 13. 김진영金震榮(이명; 海榮) : 1876~1921. 8. 23. 1896년 청송의진의 중군 장을 역임한 부친 김대락金大洛의 기개를 이어받은 그는 산남의진山南義 陣에 참여하였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창의하였던 정용기는 1907년 4월 경북 북동산北東山에서 산남의진을 재조직하였다. 이때 김진영은 장영서장將 營書掌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군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를 비 롯하여 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하는 패전을 겪었다. 김진영도 입암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진이 흩어짐에 따라 은신하였다. 이후 그는 재기를 모색하며 전국 각지를 다녔으며,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피체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쪽, 山南義陣遺史(1970) 468쪽, 義城金氏世譜(刊行年度未詳) 卷之一, 獨立運動史(國家報勳 處) 第1卷 3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