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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 청송의 독립운동사 靑松郡史(靑松郡史編纂委員會, 1962. 2. 15) 177쪽, 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474·1475쪽. 8. 김대락金大洛 : 1851~1905. 10. 1.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 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서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김대락은 처음 의진의 참모를 맡았으나, 곧이어 전투편 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김대락은 의진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김상종金象鍾 및 김 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계하며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과 교전하여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청송의진은 마평馬平과 경 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 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쪽. 9. 김숭진金崧鎭 : 1850. 5. 27~1919. 10. 24. 청송의진에 참가하여 서기書記 로서 활동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유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격문檄文」이 내도 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청송유림들은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896년 3월 12일 심성지를 대장에 추대하였다. 이때 그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 며 거의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참모진을 구성하였는데, 김대락金大洛을 중 군장으로, 남두희南斗凞을 우익장으로 삼았다. 1896년 5월 대구에서 관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5월 14일 심성 지는 김대락에게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가서 감은리甘隱里의 뒷산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