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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15 되어 1909년 5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 7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각각 징 역 5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 형이 확정되 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474·499쪽. 6. 권탁수權鐸洙 : 1835~1909. 6. 25.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 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 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 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 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용 을 갖추었다. 권탁수는 의진편성 당시 백의종사白衣從事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 洛義陣과 연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 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 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7. 김기수金基洙 : 1859. 2. 6~1925. 2. 26.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목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 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1919. 4. 24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19. 5. 19 高等法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