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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13 대한광복회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 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조직한 혁명단체였다. 이는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 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 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권영만은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북 경주에서 영 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원을 탈취하여 대한광복회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비밀활동을 수행하던 중 1918년초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경에 피체되자, 한훈韓焄· 우재룡 등과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방면에서 독립군 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해 가며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귀 국 후 권영만은 1919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 과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 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 성하여 논산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때 권영만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동지인 장응규張應圭를 상해에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 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沈永澤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권영 만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경 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高等警察要史 204·205·264·270쪽,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