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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총설; 청송지역 독립운동의 특성 / 299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거나 남만주지 역의 독립운동에 자금을 공급하는 활동에 청송인들이 참가하였다. 임시 정부의 군무부 산하 비밀조직인 주비단籌備團이나 남만주지역 군자금 공 급망이던 의용단 義勇團에 가담한 활동이 그것이다. 특히 의용단의 투쟁 에는 1910년대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보인 대한광복회와의 연결선상에 서 거사가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청송지역의 민족운동은 찾아내기 힘들다. 다른 지역의 경우는 이 시기에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이 펼쳐졌고, 대개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도시에서는 학생운동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청송에서는 지역적 성격 때문에 노동 운동이나 학생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고, 농민운동도 그리 나타나지 않 았다. 청송인들이 외지로 나가 펼친 민족운동에는 윤자영尹滋瑛의 경우가 두 드러진다. 그는 읍내 출신으로 당시 최고학부인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서울대 법대 전신)를 다니다가 3‧1운동의 주도그룹에 속했고, 서울 시위 에서 경성전수학교 연락 총책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시위에도 앞장섰 던 인물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직후부터 서울에서 사회운동의 핵심부에 자리 잡은 그는 결국 한국사회주의운동사에 굵직 한 선을 그었다. 만주와 러시아를 거치면서 이념적 무장을 다진 그는 1923년에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맹활약을 보였고, 임시정부 에도 참가하였으며 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이를 주도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만주로 이동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였으며, 1930년 을 전후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함흥지역을 중 심으로 지하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초반에 중국으로 이동한 그가 러 시아로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녔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의 정권투쟁에 휩쓸려 스탈린으로부터 숙청되고 처형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