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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 청송의 독립운동사 그렇다고 청송의병이 미약했다고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청송이 가 진 인력이나 경제력, 그리고 학문적 역량을 감안한다면, 그 어느 지역에 도 뒤지지 않는 강한 저항성을 보였다. 경북에서 남부지역은 별로 의병 이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산악전투를 많이 벌이는 중기와 후기의병에 서는 청송지역이 의병전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그 가운데 청송인들 이 입은 피해도 결코 만만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한편 의병을 주도한 세력은 전기의병에서는 양반유림이었다. 그리고 중기 이후에는 진보에서 이하현의진李夏鉉義陣 이외에는 독자적인 청송 의진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중기 이후에 북동지역으로부터 신돌석의 진申乭石義陣이, 남쪽으로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유시 연의진柳時淵義陣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활동하여, 의병들의 주된 전투지 역이 되기도 했다. 청송지역에서 계몽운동은 그리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도시지역과 비교할 경우 나타나는 큰 차이다. 도시에서는 인재양성을 위한 신식교 육기관이 등장하고 민족자본에 대한 활동이 나타나지만, 청송에서는 이 러한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가까운 안동에서 경북 북부지역 계몽운동 의 산실이 되는 협동학교가 문을 연 사실과는 차이가 크다. 또 1910년 대 항일투쟁도 미약하지만,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에 주역으로 활동 한 권영만 權寧萬의 경우는 새겨둘 필요가 있다. 청송지역의 민족운동을 다시 타오르게 만든 것이 1919년 3‧1운동이다. 청송에서 시위가 시작된 날짜가 3월 25일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일어난 셈이다. 화목장터의 시위가 격렬한 정황을 보였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아주 격렬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진보시위와 두 차례의 현 서(화목) 시위가 대표적인데, 양반유림과 기독교의 활동이 중심을 이루 었다. 특히 구세군과 장로교라는 기독교 세력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등 장한 점이 특징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