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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 청송의 독립운동사 윤성택은204) 1941년 6월 일본日本 경도부京都府 철희군綴喜郡 전변정田 邊町 소재 도촌島村 토공반장내 한국인 토공으로 일하는 김경원金京元·김 말도金末度·김석원金碩元·이상문李相文 등과 함께 한국인이 취직은 물론 모든 면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데 이 악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는 조국의 독립밖에는 없으므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위하여 활용 하는데 대비하기로 하고 항일활동을 협의하였다. 1942년 6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전시하에 일본의 피폐를 이용하 여 독립운동의 봉화를 올릴 것 등의 목표를 위해 활동하다가 피체되었 다. 1945년 9월 18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송국하였다. 동년 9월 27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이기순은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중인 1941년 4월에 동지들과 함 께 3인조 및 9인조의 독립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일활동을 벌였다고 한 다. 이들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동포마을인 고려촌을 방문하여 민족의 식을 고양하는 한편 동포유학생 및 사회인사들을 대상으로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인 징병제도 및 학병제 등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발각됨 으로서 그는 1943년 8월에 동경헌병대에 의해 피체되었으며, 혹독한 고 문을 당하다가 동년 11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소압巢鴨형무소 로 이감되었다. 그런데 이때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적 질환을 앓게 됨에 따라 1944년 10월에 가석방되었다. 204) 윤성택의 활동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집, 267-27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