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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3 03 西工學校·경도성봉중학교京都聖峰中學校에 다니면서 경도한국인유민생회京 都韓國人留民生會에 입회하여 선배들로부터 민족의식을 계몽받으면서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중견 지도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 그 후 1941년 6월 오 사카 북구北區에서 신문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던 중, 동년 8월 대판공학교 大阪工學校에 다니는 정규식鄭圭植이 신문배달원으로 고용되자 그에게 민 족의식을 고취시켜 한국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상호 맹세하는 한 편 한국근대정치사 ‧ 삼민주의三民主義 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 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 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 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이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 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 "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되었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15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 를 치르던 중 해방으로 인해 1945년 10월 9일 형이 집행 정지되어 출 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