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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3 01 12월 19일에 복권되었다.202) 그렇다면 그가 지노비에프의 동조자였기 때문에 처형된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런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연 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던 한인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정 면으로 저항했던 것은 아닐까?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다. 2) 윤자영, 새롭게 태어나다 첩첩산골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최고의 학부 를 다니던 그가 3‧1운동의 한 가운데에서 일제에 맞서 투쟁의 걸음을 내디뎠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는 바로 사회주의 물결에 참여하고 앞장서 나갔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국내간부로서, 그리고 망명하여 두 개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다시 독립운동계의 대통합 을 끌어내기 위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개조파의 맹장으로 활동 하였다. 그 직후 맥이 빠진 상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였고, 이어서 만주로 이동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을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이어서 국내로 잠입하여 함흥공단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만주로 탈출한 그는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활 동하다가 모스크바로 유학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동방공산대학을 다닌 그는 1938년에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윤자영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짧은 한 생애를 남김없이 던지 고 간 혁명가였다. 또한 뛰어난 인재요, 혁혁한 활동가였다. 이런 인물 이 민족사의 고귀한 재산으로 평가되지 못한 것은 오직 후손들의 못난 202) 이것은 후손이 신청한 민원에 대한 회신형태로 국내에 알려진 것이다. ‘구 KGB문서보관소내 스탈린 숙청당시 사망한 고려인’ 명단에 대해 연구하는 NGO단체인 삼일문화원을 통해 러시아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확인한 것이다 (외교통상부 민원회신 러시아‧CIS과-766: 2004.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