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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청송의 독립운동사 도착한 창의통문이다. 진주‧거창‧안의‧삼가‧합천‧의령‧초계‧현풍‧고령 등 영남 서남부지역의 향교를 돌아 영천향교에 도착한 이 통문은 발해진 장 소나 발한 사람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당시 영남 서남부지역인 안의에서 창의한 유생 노응규盧應奎가 진주유생 정한용鄭漢鎔과 합세하여 진주성을 점령한 뒤 발한 통문으로 보인다.12) 이러한 성격의 통문이 비슷한 시기 에 김산향교에도 접수되었는데, 같은 내용의 것으로 보인다.13) 둘째, 관동창의사 민용호의 창의격문이다. 격문의 말미를 보면, 경상도에 처음 도착하는 지방의 향교에서는 은밀히 각처 향교로 전하도록 하라는 전달 방식을 띄고 있다. 영천향교에는 1896년 정월 26일 도착하였다. 이 격문에서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따른 의분을 토로하며 교남嶠南‧호 중湖中의 각 군에서도 창의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셋째, 안동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이 1896년 정월에 발한 두 번째의 격 문이다. 이것은 안동의진이 안동부를 점령하고 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 천향교에 도착하는 시기는 1896년 정월이다. 이때 권세연의 명의로 발해 진 격문은 김산과 예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김산의 경우에는 안동‧ 예안‧진주에서 발해진 격문이 도착하였고, 예천의 경우에도 각처에서 발 해진 격문이나 통문이 도착하고 있다.14) 그 내용 역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것이다. 넷째, 국왕 고종이 1896년 정월 초6일(양력 2월 18일) 발한 애통조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창의하고 있는 의병을 선무하기 위한 것으로 영천향교에 보관된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다섯째, 통문은 영천향교가 관내 각처로 발한 것 중 임고회중으로 보낸 것이다. 이 통문을 보면 영천에서도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창의의 움직임이 12) 許善道, 倡義將愼菴盧應奎先生抗日鬪爭略傳 (등사본), 1967. 13) 呂中龍, 「時安禮各邑義檄日至,晋州之通文亦到」, 甲午‧丙申日記 . 14) 당시 예천에 도착한 통문은 羅巖 朴周大의 羅巖隨錄 에서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