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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93 에 자리 잡은 중국공산당에 만주지역 조선공산당원의 중국공산당 가입에 관한 코민테른의 건의를 전달하였다. 그러자 1930년 1월에 중국공산당 은 재만한중공산당간부연석회의를 열고 조선공산당원들이 “중국혁명운 동에 직접 참가하는 방식으로 조선혁명사업을 지원하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184) 그래서 1930년 전반기에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던 조 선공산당원들이 속속 중국공산당에 개별 입당의 길을 밟았다. 조선공산 당재건설준비위원회 구성원들은 서둘러 국내로 진입한 데에는 이러한 상 황이 추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이 여러 시기에 걸쳐 잠입한 이유는 처음에 당 재건운동이 “분산 적 파견에 의한 거점확보에 치중한 듯하며, 이것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조직적, 전면적 진출에 의한 계통적 재건공작으로 전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상훈‧송무영‧김철수는 전자에 속하며, 윤자영‧김일수‧조덕진‧ 홍달수의 경우는 후자에 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5) 이들이 국내로 대거 잠입한 이유에 대해 다른 이유를 제기한 견해도 있다. 즉, 윤자영을 비롯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요원이 국내 로 진출하게 된 이유를 ①간도 5‧30폭동 이래 공산주의자에 대한 중국관 헌의 과도한 탄압에 비하여, 국내에서는 비록 검거되더라도 법률에 의하 여 재판을 받고 또 그 형벌도 경미한 점을 고려하여,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 ②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가 입한다고 하더라도 종래부터의 ML 및 화요파의 파쟁의식 때문에 그 길 을 좋아하지 않았던 점에서 찾았다.186)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미리 국내 184) 金春善, 「朝鮮共産主義者들의 中共加入과 双重革命 硏究」, 民族統一戰線 的形成與中韓抗日鬪爭 (2004. 4. 19, 北京大學東北亞硏究所‧延邊大學民族硏 究院‧韓國近現代史學會, 246쪽). 185)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285쪽. 186) 京畿道警察部, 「共産黨朝鮮國內工作委員會檢擧ニ關スル件」(1931.7. 18), 23-24쪽; 「後繼共産黨豫審決定書」(제1회);《朝鮮日報》1931년 2월 8일(김준엽‧김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