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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들은 기관지 「볼셰비키」라는 팸플릿을 발행하여 조선공산당 재조직 문제‧전술‧조선혁명‧토지문제 등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여 선전에 주력하 였다. 또 국내에 조선공산당 및 청년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안상훈‧송무 영宋武英‧홍달수洪達洙‧김철수 등을 연거푸 잠입시켰다. 그러나 안상훈‧송 무영은 곧 검거되었고, 김철수도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다 만 홍달수는 청진‧함흥 등을 왕래하면서 세포조직과 국외 연락을 담당하 고 있었다.179)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 제2인자로서 조직부를 담당하던 윤 자영은 1930년 10월에 국내로 잠입했다.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겠 다는 목적을 띠고 들어온 것이다.180) 북간도에 머물던 ML파나 화요파 와 달리 윤자영을 비롯한 서울‧상해파의 대다수는 국내 잠입의 길을 택 한 것이다. “자체 조직을 해체하고 앞 다투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던 재 북간도 엠엘파, 화요파 사람들과는 달랐다.”181) 1930년 1월에 책임자인 김철수가 먼저 입국하였고,182) 5월부터 10월에 이른 동안에 조덕진‧김일 수金一洙 등 간부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김철수가 귀국한 뒤, 윤자영은 대표자로서 활약하면서 김일수‧홍달수 등의 국내공작원을 투입했고, 자 신은 거의 마지막 순서로 10월에 잠입했다.183) 1929년에 조직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가 1930년 1월부터 국내 로 진입하기 시작한 원인에는 무엇보다 중국공산당의 방침결정이 중요하 게 작용한 것 같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한빈韓彬과 이춘산李春山이 상해 179)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285쪽. 180)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293-294쪽. 181)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16쪽. 182) 後繼共産黨豫審決定書(제1회); 金綴洙 外 20人調書⑴ , 180-181; 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285쪽. 183) 金錣洙 인터뷰, 1967년 5월 15‧16일(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