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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 청송의 독립운동사 2. 윤자영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결성과 국내잠입공작 윤자영이 다시 조선공산당 활동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1928년말에 등장했다. 상해에서 만주로 이동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활동의 중심축에 서게 된 것이다. 그가 만주로 이동하던 시기에 대공황의 여파 로 전세계가 불황과 불안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특히 한중 국경지대에 서는 한인농민들의 반일폭동이 줄을 이었다. 함경남북도 각 군의 농민 폭동, 북간도 5‧30폭동, 길돈폭동, 추수폭동, 춘황폭동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이 급격히 좌선회 하던 시절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대공황을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로 여기고, 혁명의 불길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정책을 취하 여, 대중을 무장봉기와 폭동 전술로 이끌었다.175)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획 득하기 위한 계파 사이에 경쟁적으로 나타났다. 1928년 8월에 모스크바에 코민테른 제6차대회가 개최되자 당시 재외조선인 공산당그룹 가운데 ML 파는 양명梁明‧한빈韓斌 2명을,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에 근거를 두고 있었 던 서울‧상해파는 이동휘‧김규열金圭烈 2명을 각각 보내어 대표권 획득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의 파벌투쟁이 조선의 혁명 사업만이 아니라 동양적화정책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유 로 어느 쪽도 대표권자로 인정하지 않았다.176) 뿐만 아니라, 아예 조선 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그 해 12월 7일부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 회 정치서기국의 이름으로 「조선에서의 정치문제 결의」와 「조선 혁명공 인과 농민에게 보내는 글」(‘12월 테제’)을 발표했다. 그 골자는 ‘민족부르 175)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15쪽. 176) 梶村秀樹‧姜德相, 現代史資料 29, 東京:原書房, 1972, 320-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