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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9 창의한 의진이다. 김산의 양반유생 여영소呂永韶(祚)가 이미 1895년 12월 통문을 돌리며 기의를 모색하였는데, 이때 안동‧예안‧진주 등지에서 창의 격문과 통문이 향교로 날아들었다. 향교는 양반유생이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집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창의과정에서 각 의진은 창의 격문이나 통유문을 각처로 발하여 창의 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송의진靑松義陣의 경우에도 볼 수 있다. 을미의병시 청송에서 창의한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의 적원일기赤 猿日記 를 보면 창의 격문이나 통유문이 안동‧예안‧진주 등지로부터 접수되 고 있다. 그 구체적인 접수 상황은 물론이고 그 내용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어 주변 군현의 의진과 상호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 다.10) 뿐만 아니라 예천의진에 참가했던 박주대朴周大의 나암수록羅巖隨 錄 에도 1894년 안동의병에서 서상철이 발한 포고문布告文을 비롯하여, 1896년 을미의병시 안동부 관할 각 군현에서 발해진 서상렬의 격문檄文‧ 예안통문禮安通文‧삼계통문三溪通文‧영천(영주)통문榮川通文 등이 속속 날아 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11) 을미의병에서 각지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던 의병 문서 5건이 현재 경북지방 43개 향교 중 유일하게 영천향교에 보관되어 있다. 1895년 12월 부터 1896년 정월 사이에 발해진 것으로 보이는 4건은 격문‧통문通文‧ 애통조哀痛詔이며, 그리고 1건은 영천향교의 임고회중臨皐會中에서 향내 각처로 발한 통문이다. 이 격문과 통문은 을미의병의 창의 경위와 그 성격 을 파악하는데 관건이 되는 매우 시사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격 문과 통문의 검토를 통해 전기의병의 창의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95년 12월 28일(음력) 발해져 1896년 1월 7일(음력) 영천향교에 10)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1) 朴周大, 羅巖隨錄 , 國史編纂委員會,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