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page

284 / 청송의 독립운동사 다는 셈이다. 이후 그의 행적은 소상하지 않다. 1927년 3월에 모스크바로 갔다가, 5월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1927년 7월에 용정에 서 상해파 공산주의자그룹인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고 전 해진다.172) 2. 시사책진회와 심상완 상해로 망명한 심상완은 여운형이 주도하고 있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에 참여하게 된다. 이 단체는 1922년 중국 상해에서 결성된 협의체로서 각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한 몇 가 지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19년 성립된 대한민국임시 정부가 실력양성론과 외교독립론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곧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1921년 독립운동전선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임 시정부의 활동과 전체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 의 개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같은 논의는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국민대 표회의 ‘소집선언서’를 발표하고 임시의정원에 후원을 요청하는 ‘인민청원 안’을 제출함에 따라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임시의정원에서는 의원 상호 간 심한 의견 차이만 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형권韓馨權이 소련 정부 로부터 받아온 독립운동 원조금 20만루불 사용 문제까지 겹치면서 독립 운동전선 내부에서는 심각한 정쟁과 파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해 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회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단체의 주도적 인물들로, 안창호 172) 성대경 편, 강만길 저, 사회주의인명사전 , 창비,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