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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들이 과학적 공산주의를 지향하면서, 민족혁명에 공헌해야 한다는 방침 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사회연구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윤자영 을 비롯한 이화천李花天‧현즙민玄楫民‧김상덕‧조덕진 등을 그 위원에 선임하 였다.166) 윤자영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로서 청년동맹회를 공산주의 와 민족운동을 묶어내는 조직체로 이끌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청년동맹회 활동 이면에서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와 관련된 활동도 진행해 나갔다. 유명무실하게 된 꼬르뷰로를 대신하기 위 하여 1924년에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오르그뷰로라고 불리는 단체였다. 윤자영은 이 단체에 서도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 그는 오르그뷰로 기관지 거화 炬火 의 편집 을 담당했다.167) 3)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주도 상해에서 활동하던 윤자영이 1926년에 만주 길림성 지역으로 이동하 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치하는 것이 그의 다음 행보였다. 그가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국내에서 상해로 탈출한 김찬金燦과의 만남 이었던 것 같다. 1925년 11월에 국내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에 대한 검 거가 시작되자, 김찬은 상해로 망명하였다. 김찬을 만난 윤자영은 협의 결과 일단 주도세력이 거의 모두 체포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 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서 윤자영은 1926년 4월에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화요파 인물인 최원 택崔元澤‧조봉암曺奉岩‧김동명金東明 등도 같은 임무를 띠고 만주로 파견 16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72쪽. 167) 「이력서」;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