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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81 이다.161) 때문에 일제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 열 을 올렸다. 당시 일제 경찰이 파악한 그의 이름이 윤석한이고, 호가 불가 살이었으니,162) 그의 기개를 헤아릴 수 있다. 그러다가 1925년에 그의 활동 소식은 뜸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수학 생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1925년 8월부터 1926년 2월까지 상해대학에 청강하고 있었던 것이다.163) 당시 그에 관한 자료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925년 2월에 청년동맹회가 확장을 기도하던 무렵, 의열단과 일시적으로 갈등을 벌인 점이다. 김원봉金元鳳이 윤자영과 현 정건玄鼎健을 구타했다가 이를 사과한 사건이 발생했는데,164) 조직의 확 장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가 아닌가 추정된다. 김지섭의 도항을 도와주 는 등 의열단에 협조했던 윤자영에게 김원봉이 폭행을 가했다는 사실은 상해의 청년운동과 의열단의 지형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얼마 뒤에 김원봉은 의열단 간부들을 데리고 광주로 이동하여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 學校 4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25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발행된 청년동맹회가 회보 제1호가 있다. 그 속에 네 가지 ‘투쟁강령’과 함께 선임된 위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 타났다. 1. 한국이 독립이 될 때까지 전민족적으로 민족혁명에 공헌할 것. 2. 전민족의 前途는 과학적 공산주의로 인도할 것. 3. 민족을 본의로 하는 계통도 있고, 규율 있는 조직으로 실현할 것. 4. 혁명진행에 대하여 장애가 되는 일본제국주의의 주구, 또는 그와 접근 하는 자, 혹은 기회를 보고 타협하는 자를 배제할 것.165) 161)《朝鮮日報》1924년 5월 16일. 162)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36쪽. 163) 「이력서」. 164)《선봉》1925년 2월. 165)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