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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 청송의 독립운동사 진趙德津‧윤소야(자영)‧김상덕金尙德‧장덕진張德震‧엄항섭嚴恒燮‧주요한朱曜 翰‧조윤관趙允寬‧최충신崔忠信‧박진朴震 등이며, 윤자영은 조덕진‧김상덕‧장 덕진‧최충신과 더불어 상무위원이 되었다.156) 면모를 보면, 엄항섭이나 주 요한처럼 임시정부와 안창호 계열의 인물도 포진하고 있어서, 청년전위조 직으로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로 하여금 국 민대표회의 이래 결렬되고 분열된 정국을 극복하는 데 나서도록 압력을 넣은 것이다. 이것은 ‘이동휘의 민족당 구상’을 국민대표회의와 1926년부 터 추진되는 유일당운동 사이에 일단의 통일전선운동의 하나로 이해하는 기왕의 연구에 비견한다면,157) 청년동맹회도 그러한 차원에서 바라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청년동맹회 결성 소식이 국내외로 퍼지면서 호응이 크게 일어나 회원수가 200명을 쉽게 돌파하였고, 윤자영은 조덕진‧장덕진과 더불어 핵 심인물로 알려졌다.158) 이처럼 윤자영은 김지섭 의거 지원으로 일제의 추적을 받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신문기사 는 “상해에 있는 일본영사관에서는 그를 체포코자 백방 활동 중이나, 그 는 정치범인고로 불국佛國 경관은 극력 보호하여 아무 일 없이 청년동맹 의 중요간부까지 되고 있는 중이라더라”라고 보도하였다.159) 청년동맹회를 중심한 윤자영의 활동은 2년 정도 지속되었다. 1924년 8월 29일에 열린 국치기념회에서 기념사를 맡았다.160) 그의 움직임은 일제경 찰의 신경을 집중시켰다. 1924년 5월에 그가 일본에 잠입했다는 설과 일제경찰이 엄중 경계하고 있다는 보도는 그러한 정황을 말해주는 사례 15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04쪽. 157) 張錫興, 「1920년대 중기 민족적 혁명당 형태의 계획과 통일전선구도」, 民族 統一戰線的形成與韓中抗日鬪爭 (2004. 4. 19, 북경대학동북아연구소‧연변대학민 족연구원‧한국근현대사연구회), 52-56쪽. 158)《朝鮮日報》1924년 5월 8일자. 159)《朝鮮日報》1924년 5월 8일자. 160)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