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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 청송의 독립운동사 < 윤자영 관련기사;《조선일보》1924년 5월 8일자> 윤자영이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이유에 대해, 일제 경찰은 임시정부를 에워싼 핵심인물들의 정국돌파 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즉, 국민대표회의 이후 맥이 빠져버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운형呂運亨‧ 안정근安定根‧남형우南亨祐‧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의 핵심인 물들이 ‘대동통일취지서大同統一趣旨書’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각지에 배 송했는데, 그 요지가 민족적 일치단결을 요구한 것이었다.150) 이 취지 서가 배송된 직후에 윤자영의 활동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해석한 것 이다. 그렇지만 이 취지서는 국민대표회의에서 형성된 창조파 그룹이 1923년 6월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1924년 3월에 북경으로 철수한 직후에 나온 것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요구하는 제안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를 이탈하여 국민위원회를 결 성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한국독립당안’을 마련하여 새로운 정부 구실을 하려했다. 그렇지만 상해파의 최고지도자인 이동휘와 블라디보 스톡 현지의 반대여론, 그리고 코민테른의 철수 명령으로 말미암아 북 150)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