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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77 12월 16일에 윤자영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기로 청했고, 약속장소에 서 김지섭을 소개받았다. 그래서 김지섭이 일본화물선을 탈 수 있도록 길 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146)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들이 프랑스조계 공무국 경찰과 더불어 윤자영 검거에 나섰다. 그들이 1924년 1월 27일 새벽에 윤자영의 근거지로 알려진 망지로望志路 50번지와 하비로 23번지 를 급습했지만, 윤자영은 이를 피하는 데 성공하였다.147) 그래서 그는 김지섭 의거로 말미암아 쫓기는 상태가 되었고, 불구속상태에서 기소되 었다.148) (나) 상해청년동맹회 결성과 통일전선운동 김지섭의 일본행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일제경찰의 추적 을 받았지만, 윤자영은 얼마 뒤인 1924년 4월 5일에 상해 프랑스조계 팔선교八仙橋에 자리 잡은 삼일당三一堂이란 교회에서 청년동맹회를 창 립하였다. 저녁 7시 반에 시작된 창립총회에서 윤자영은 사회를 보았 고, 11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49) 일 제의 추적이 계속되었지만, 이를 따돌리면서 공개적인 활동을 지속한 대담함을 읽을 수 있다. 14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463-467쪽. 14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임정편 5), 1991, 27쪽. 148)《朝鮮日報》1924년 5월 8일자. 149)《朝鮮日報》1924년 4월 12일자. 필자는 과거에 삼일당을 상해시 강서로에 있는 삼일교당, 현재의 황포구 인 민대례당이라고 파악한 일이 있다(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 지식산업사, 1995, 6쪽). 하지만 다시 확인한 바로는 삼일당은 당시 프랑스조계 구역 八仙橋 三一禮拜堂이다(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