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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75 부담을 안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 상해파 의원이던 문시환 을 통해 국민대표회의로 하여금 임시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결의안을 상정시키고 통과시켰다가,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물거 품이 되어버린 사건도 이러한 부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상해파가 임시정부를 개조에 매달린 상황이 이해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나자, 윤자영은 회의에 주도적으로 움직인 만큼 반대급부를 당해야 했다. 개조파에 가담했던 상해파에 분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임시정부옹호세력과 연합하여 개조론을 이끌어 나간 상해파는 안팎으로 공세에 시달렸다. 즉 안으로는 국민대표회의 후반 기에 윤자영을 대신하여 안창호와 함께 개조파의 전략을 이끌었던 김 철수가 상해파 프랙션 내부로부터 공격을 받았고,140) 꼬르뷰로는 국민 대표회의에서 실패한 요인을 윤자영그룹의 탓으로 돌렸다.141) 즉 코민 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 책임자인 보이틴스키가 꼬르뷰로에 보내는 서한 에서 “실패의 책임을 공산주의 프락치가 져야 하고, ‘윤자영 그룹이 조 선에서 혁명센터를 형성하는 데 대한 꼬르뷰로의 지시를 위반한 책임을 져야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142)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의 한 축 을 맡았던 윤자영으로서는 강한 후폭풍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 시 상해에 급파된 일제경찰 간부는 “윤자영이 60여명으로 구성된 상해 고려공산당의 대표”로 파악하고 보고하였다.143) 결국 무대 위에서 받는 그의 스포트라이트는 반대세력이 겨누는 과녁이 되는 것이었다. 140)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307-308쪽. 141)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296-297쪽. 142) 보이틴스키, 「조선의 민족적 당 창건 및 민족해방운동의 전략」, 1923.8.7, 132-134쪽(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316쪽에서 재인용). 143)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4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