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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 청송의 독립운동사 시기이다.136) 그리고 이후부터 그는 핵심에서 움직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윤자영의 활약은 한 축을 형성할 정도였다. 예를 들 자면 국민대표회의 벽두에 그가 대표자가 되어 제안한 ‘시국결의안’을 주 도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럴만한 이유는 그가 개조론을 밀고나가는 그룹 가운데 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외곽에는 국민대표 회의를 이끌어내고 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중심축에 안창호 安昌浩와 서 간도를 비롯한 친임시정부 세력들이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윤자영과 김철수金錣洙를 비롯한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국민대표회의 안 에 프랙션을 구축하고, 임시정부의 개조를 찬성하고 나섰다. 즉, 임시정 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조직체를 결성하자는 창조파와 정부를 현실에 맞게 틀을 고치자는 개조파로 나뉘었는데, 그는 상해파를 이끌면서 후자 에 가담한 것이다.137) 그가 제시한 개조론의 기본 방향은 “피압박 민족 들의 혁명운동과 우리 혁명가들의 단일전선 조직과 현 시기 운동의 성격 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유혈 수단에 따른 조직-투쟁”으로 이러 한 요구에 맞게 임시정부의 개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138) 윤자영은 상해의 상황을 꼬르뷰로에 보고하면서, 임시정부의 개조가 당연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1923년 3월, 국민대표회의가 민족운동 의 지도기관을 수립하는 문제에서 신조직 건설론‧임시정부 개조론‧임시 정부 및 임시의정원 유지론의 세 파가 호각세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로 묶으려면 임시정부의 개조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꼬르 뷰로에 보고한 것이다.139) 이것은 이르쿠츠크파가 창조론으로 나아간 것과 정반대의 길이며, 따라서 윤자영은 개조론을 성사시켜야만 하는 13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307쪽. 137) 안창호자료집 1, 67-69쪽. 138)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314-315쪽. 139)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