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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73 은 이 대회의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파견되고, 모스크바로 갔다.”132) 즉 대회가 끝난 직후에 윤자영이 이동휘‧김성우(김아파나시)와 함께 연 합대회와 중앙간부 승인을 받기 위해 파견될 코민테른 파견대표로 선출 되었던 것이다.133)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회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결과에 반대하면서 치타에서 별도의 회의를 가지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 장하고 나섰다. 그러자 코민테른은 결국 베르흐네우진스크의 통합회의에 서 결의된 내용을 부인하고 말았다.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의 결과를 부인하고 조선문제위원회 를 조직하여 12월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해산을 명령하는 한편 극 동부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했다. “무원칙한 파쟁을 버려라. 민족운동의 지도적 집결을 촉성해라. 민족단체 안에서 일을 열심히 하되 간부 자리 를 다투지 말라”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꼬르뷰로는 상해에서 열리 게 된 국민대표회의에 양 파의 대표를 파견했다. 상해파의 윤자영과 이 르쿠츠크파의 장건상張建相이 곧 그들이다.134) 그래서 윤자영이 급히 상 해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나) 국민대표회의와 개조파 활동 모스크바를 다녀온 윤자영이 상해에 도착한 시기는 대개 1923년 벽두 라고 생각된다. 상해에 도착한 윤자영은 국민대표회의에 경북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135) 그가 참석한 기록 가운데 2월 12일이 가장 빠른 132)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22쪽. 133) 金規勉, 「老兵 金規勉의 備忘錄에서」(원고본,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280-281쪽에서 재인용). 134)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 일조각, 2003, 293쪽. 135) 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 지식산업사, 1995,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