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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영은 이득년李得秊‧김한金翰‧홍증식洪璔植‧김사국金思國‧이영‧장덕수‧김명식 金明植‧오상근吳祥根‧한신교韓愼敎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119) 그리고 서울청년회 기관지인 아성 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많은 작품 을 투고한 점으로 짐작하건데,120) 그가 서울청년회의 핵심인물임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윤자영이 벌인 조선청년회연합회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전국 을 순회하면서 벌인 강연과 아성 에 기고한 것이었다. 1921년 6월에 조선학생대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김사국‧이원식과 더불어 「배재학 생선후책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한 이후,121) 8월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순회에 나섰다. 윤자영은 오상근 회장 및 신현복과 더불어 조치원 을 들러 연기청년회 대표를 만났으며, 청주청년회 대표를 만나 회합을 가졌다.122) 이어 9월 8일에는 경남 창녕군 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가졌 는데, 윤자영은 3백 명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조운동改造運動의 선구자先驅者’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어서 그는 밀양청년회관을 거 쳐, 양산으로 갔다.123) 이어서 9월 26일에는 울산청년회관에서 열린 강 연회에 참석하였다. 회장 오상근이 ‘각 청년단체와 연합회’라는 주제로 강연한 직후에 윤자영이 ‘청년운동의 제일보第一步’라는 제목으로 강연하 였다. 그 자리에서 “도도한 웅변을 시試하여 일반 청중에게 막대한 자극 을 주고 갈채리에 10시 반경 폐회”하였던 것이다.124) 윤자영이 펼친 순회강연의 전체적인 일정과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가 청년운동의 확산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이후 119) 裵成龍, 앞의 글, 「朝鮮思想通信」 제851호(1929년 1월 15일) 75쪽. 120)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我聲」에 실린 윤자영의 글. 121)《朝鮮日報》1921년 6월 30일자. 122)《東亞日報》1921년 8월 15일자. 123)《東亞日報》1921년 9월 28일자. 124)《東亞日報》1921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