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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63 그들이 직접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파견하여 사형에 처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의용단이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군정서의 그 것을 대신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철저히 조직을 숨기기 위한 방법이 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령서‧사형선고 등의 문건을 통한 군자 금 모집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의용단원은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섰다. 두 번째의 방식은 단원의 연고지를 기점으로 하여 친분이 있는 사람 이나 지역 유지를 찾아가 직접 위임장과 사령서를 제시하면서 군자금 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의용단의 경우는 이러한 방법이 아니라, 사령 서를 받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그들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내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사령서를 받은 조정식은 그의 아들인 조성우趙性佑를 이종 국에게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했는데, 이때 이종국은 이정희와 함께 그 에게 군자금 3만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이종국과 이대기는 조정식을 찾아가 1만원의 군자금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액면 5천 원의 약속어음 2매를 받을 수 있었다. 양한위는 1920년 12월경에 영주 풍기에 살고 있던 이종대李鍾岱에게 독립운동군자금 모집원이라고 밝히고 200원 을 요구하였으나, 20원을 군자금으로 제공받았다. 세 번째 방법은 단원이 군자금을 갹출하는 것이다. 손영기는 현금 39원 과 시가 90원에 해당하는 벼 3석을, 서상업은 40원을, 이명균은 20원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 외에도 환약을 만들어서 그것을 판매하는 것 처럼 위장한 군자금 모집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아울러 태을교가 포교 의 방식을 이용한 군자금 모집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태을교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운동을 펼쳤는데, 의용단이 활동하던 시기에 안동‧청송‧영양‧영덕‧경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으고 있다.115)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21년 일제경찰에 포착되면서, 이군명 李君明을 비롯 115) 성주현, 「1920년대 초 태을교도인의 민족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2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