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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 청송의 독립운동사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군자금 모집 방법에 일대 변환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국내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 람을 주축으로 한 군자금 모집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이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직인 바로 의용단이었던 것이다.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은 1920년 10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경북 안동‧영천‧군위‧영일‧영덕‧청송 그리고 경남 창녕이 주된 대상 지역이었다.113) 군자금 모집을 위해 사용된 물품은 서로군정서 및 임시정부 명의로 되어 있는 군자금 사령서‧경고문‧사형선고서 등이었다. 이 문건은 단원이 직접 우송한 것이 아니라 대구나 김천 등지에서 우편 으로 발송하였다. 대한광복회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 던 방법과 같은 방식이었다. 대한광복회의 경우는 주로 해외에서 발송한 경우가 많았는데 비해, 의용단은 주로 국내에서 그것을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의용단이 군자금 사령서를 비롯한 경고장이나 경고문 등을 우편 으로 보낸 것은 조직이 일본경찰에 발각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한 것 이며,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태을교太乙敎의 포교방 식을 빌리는 경우, ‘총명환聰明丸’이라는 환약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방식으 로 위장한 방법도 이용되었다. 또한 단원이 군자금을 제공할 대상을 물색 하고 직접 방문하여 그것을 요구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효과적 인 방법은 사령서를 비롯한 문건을 우편으로 발송한 후 단원이 군자금을 수령하러 가는 것이었다. 의용단이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 113)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 과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건은 일제의 판결문과 신문기사가 유일하다, 일제의 판결문은 「豫審終決書」( 독 립운동사자료집 10)과 대정 12년 刑公 제599호(대구지원), 신문은《東亞日 報》(1922년 12월 17일‧12월 21일‧12월 23일‧12월 30일자)와《每日新 報》(1922년 12월 21일‧12월 30일자)에 의용단 사건이 자세히 적혀 있다. 군자금 모집에 관련한 서술은 이 기록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부분 서술에서는 註를 생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