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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59 규합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에 설립된 이후 실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여 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무기수입과 재정을 꾸려나가기 위한 자금모 집이 당면한 중요과제였다. 우선 서로군정서에서는 관할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자치기구인 한족회를 중심으로 한 유하현‧통화현‧홍경현‧환인현‧집 안현‧임강현‧해룡현‧관전현寬甸縣 등의 한족회 관할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로부터 군자금을 갹출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추진한 한족회의 군자 금 갹출은 당시 이 지역의 한인은 독립운동의 지도층과는 달리 한말이나 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을 피하고자 이주한 상태였기에 많은 군자금을 얻 지 못하였다. 다음으로는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군자금의 모집활동은 주로 1919년과 1920년대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모금액도 그 기간 동안 상당한 액수에 이르고 있었다.112) 군자금 모집 장소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이 평안도 지역이다. 이곳에서 의 모금활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평안도와 서간도 와의 지리적인 밀접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경상북도 지역 이 주목된다. 이것은 서로군정서의 지도부 대다수가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은 대개 평안도 출신이, 경상도 지역에는 경상도 출신이 파견되었던 지역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 다. 그들은 자신의 출신 지역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며, 연고지역에 경제적인 기반을 두고 이주한 경우도 많았기에 서로군정 서에서는 그들을 해당 연고지에 파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이러한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모집 활동이 1921년 이후부터는 거의 112) 愛國同志授護會, 韓國獨立運動史 , 289-290쪽; 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 動史料 (三一運動篇其二), 443쪽; 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 (三一運動 篇其三), 70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군전투사자료집 10, 747-748쪽; 金乙東, 安東版獨立史 , 134쪽;《獨立新聞》1922년 8월 29일‧1922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