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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 청송의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의 기초를 정비해 갔다고 하나 폭넓은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확 산되어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 초의 비밀결사는 우선 양적인 면에서 191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팽창을 이루었 다. 그리고 3‧1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비밀결사가 시위운동이란 제한된 범위에서 추진된 것이라면,103) 계통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을 담보하는 가 운데 독립운동의 중심적 주체로 부상되고 있었다. 즉, 3‧1운동의 이전과 1920년대 초의 비밀결사는 주객관적 조건이 변화된 까닭도 있지만, 양과 질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담당 주체의 면에서 볼 때, 1910년대의 비밀결사가 소수의 선구적 인사 들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어 갔던 것과104) 달리 1920년대 초의 비밀결 사는 폭넓은 계층의 참여를 수용하면서 독립운동의 인적 기반을 넓혀 갔 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발전적 측면을 그려볼 수 있다. 3‧1운동 직후에 자생적인 비밀결사가 전국적으로 생겨나고 있었던 점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확산되어 갔던 시 대적인 반영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이념면에서 보면, 1910년대의 비밀결사는 복벽주의 이념과 입헌군주 론의 보황주의 保皇主義, 105) 그리고 공화주의 이념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 1969, 36쪽; 趙東杰, 「1910년대 獨立運動의 變遷과 特性」, 韓國民族主義의 成 立과 獨立運動史硏究 , 지식산업사, 1989, 361-389쪽; 姜英心, 「朝鮮國民會 硏 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170-171쪽; 權 大雄, 「日帝下 抗日獨立運動團體 民團組合」,《韓國學報》74, 일지사, 1994, 89-99쪽). 103) 朴杰淳, 「3‧1運動期 國內 秘密結社運動에 대한 試論」,《한국독립운동사연구》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182-187쪽. 104) 姜英心, 「朝鮮國民會 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172-173쪽. 105) 1910년대 복벽단체로는 척사유림의 의병조직인 독립의군부와 民團組合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이와 같은 척사적 복벽주의는 1915년 민단조합의 발각으로 끝을 맺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趙東杰, 「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