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page

236 / 청송의 독립운동사 물의 가격폭락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932년에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농산물의 가격 폭락으로 자작농, 자작 겸 소작농이 빚을 갚기 위해 토지를 매각하거나 저당 잡힌 토지를 강제로 매각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또한 농촌에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농촌을 떠 나 화전민이 되는 경우가 계속 증가했다는 점은 당시 농민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일제의 화전민 정리사업 에도 불구하고 화전민의 수가 이처럼 크게 늘어난 이유는 농촌에서 토 지를 잃은 사람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비참해졌다. 세계공황으로 농산물의 가격은 폭락하여 생산비를 건지 기는커녕 세금을 내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 시 농촌으로 들어와 1930년 초부터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으며, 봄을 넘 기지 못하고 양식이 바닥났다. 가뭄 피해가 극심했던 1928년 봄에 양식 이 떨어진 농가의 비율은 21.8%에 불과했으나, 1930년에는 일찍이 보기 드문 대풍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식이 떨어진 농가의 비율은 줄어들 지 않았으며, 1933년 1월에는 무려 43.8%에 달했다. 즉 절반의 농민이 봄에 굶주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생존권을 위한 투쟁은 더욱 치열 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투쟁은 독립운동으로 상승, 발전하였다. 이 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새로운 농업정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931 년 조선총독 우카키[우원일성宇垣一成]는 조선 농민들의 가난은 근본적 으로 농민이 게으르고 낭비가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농민 스스 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력갱생’과 ‘진흥대책’을 내세웠다. 이것 이 바로 ‘농촌진흥운동’이었다. 즉 농민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더 열심 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농업경영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