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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 청송의 독립운동사 미국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된 공황의 근본 원인은 공업과 농업 생산품 의 비약적 증대에 반하여 구매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빈약한 상태, 즉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 있었다. 공황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파급되어 세계경제공황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영국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보호 무역주의에 기초한 블록경제권을 확립하거나 국가주도의 경제부흥계획 등을 통해서 이러한 위기를 타개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일본 등 후발자본주의 국가는 해외시장은 물론이고 국내시장마저 선진자본 주의 국가에 비해 협소했으므로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따 라서 상품수출은 물론 국내 소비마저 크게 줄어들어 공장들이 문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났으며,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갔던 이들이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일본에서는 유례없는 대풍작으로 미곡가격 이 폭락하였다. 일본의 지주들은 줄어든 이윤을 만회하고자 더욱 농민 들을 수탈했다. 따라서 일본의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 가운데는 한국 쌀의 수입금지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미곡의 일본 수출이 중단되었으며, 한국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만들려고 실시되 던 ‘산미증식계획’도 1934년에 중단되었다. 이처럼 일제가 자국의 모순을 한국으로 전가시킴에 따라 인구의 절 대 다수를 차지하던 한국의 농민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인 과 한인 지주들은 공황과 농산물 가격폭락으로 인한 이윤의 감소를 만 회하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를 위해 고율의 소작료를 받거나 고리대 등을 동원하였다. 농민들은 미곡가격의 폭락으로 생산비조차 건 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토지는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에게 넘어갔다. 당시 한 신문보도에 의하면, 공황이 발생하기 전에는 쌀 한 섬을 팔면 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