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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조선연맹’은 하부조직으로 행정단위인 도·부군도府郡島·읍면·정동리町洞 里 등의 지방연맹과 관공서·학교·회사·은행·금융조합·공장·상점 등의 각 종 연맹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애국반을 두었다. 이 조직은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 부문의 여러 운동을 통합하여 ‘국민총력 조선연맹’으로 재편되었다. 2. 일제의 경제수탈 정책의 강화 1)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앞장세운 경제 수탈 일본에서는 191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 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에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웠다. 이 계 획은 토지와 농사 개량에 의해 식량생산을 대폭 늘임으로써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그 부담을 한국 농민들에게 이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추진되었다. 그러나 제1차(1920∼1925)‧제2차(1926∼1934) 계획이 계속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현재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데 불과하였으나,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 하였다. 1932∼1936년의 쌀 생산량은 평균 1,700만 석인데, 일본으로 가 져간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 석이었다. 그 결과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20년대의 약 일곱 말에서 네 말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7말을 소비하였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조‧수수‧콩) 등으로 충당했다. 한국 농민들은 식량사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수리 조합비 부담으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또 한 농업구조와 유통구조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