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page

230 / 청송의 독립운동사 진정책이란 이름 아래 대륙병참기지화를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는 본국으로부터의 군수물자 조달이 불가능해지더라도 대륙에서 의 전투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경인지방‧부산‧평양 등지에 대규모 군수공장을 건설하였다. 청진‧흥남 지역에는 제철소와 제강소가 건설 또는 확장되었고, 흥남‧남포 등지에는 마그네슘‧알루미늄 등 경금속 공 장이 건설되었다. 또한 순천의 화학공장을 비롯하여 석유 정제‧유지油 脂 및 화약제조 공장이 만들어졌다. 군수공업 성장 정책에 따라 1940년부터 한국 광공업의 생산액은 농 축산물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이러한 군수산업의 성장은 한국 민중 들의 크나큰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는 1938년에 ‘국가총동 원법’을 공포한데 이어, 1939년에는 ‘국민직업능력 신고령’을 비롯한 노 무관계 법령을 계속 공포하고 이를 한국에도 적용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소개소령’을 공포하여 한인을 대대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렇게 강제 연행된 노무자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북쪽 지방의 공 업지대뿐만 아니라 사할린, 남양군도南洋群島의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되 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강제로 동원되는 노무지의 수는 더욱 증가 하였다. 그래서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강제 동원된 한인은 113∼146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국민학생까지 군사시설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1944년에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만들어 수십만 명의 여성들을 징집하여 일본과 한국 내의 군수공장으로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정신대에 끌려온 여성 가운데 일부는 남양군도의 일선 지구에 보내져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위안부 노릇을 하는 등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남양군도의 일선지구에 보내어 군인 상대의 위안부 노릇을 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중일전쟁 후 일제는 각종 공출제도를 실시하여 민중들을 약탈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미곡의 공출이었다. 1939년에는 미곡 배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