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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21 2. 서울 3‧1운동의 핵심에서 활동 윤자영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첫 걸음은 3‧1운동이었다. 서울에서 경 성전수학교 1학년으로 재학하던 그는 3‧1운동 계획단계와 출발단계에서 중심축을 구성한 학생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3‧1운동을 준비 하던 1∼2월에 1학년이었다면, 그가 입학한 시기는 1918년일 것이다. 당 시 서울 재동齋洞 60번지에 주소를 둔 윤자영은 경성전수학교 연락총책으 로서 중앙지도부와 학교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학생대표들이 3‧1운동의 계획단계에 참가하게 된 중심축은 기독교청년 회 총무 박희도 朴熙道였다. 박희도는 1919년 1월 23‧24일경에 연희전문학 교 학생인 김원벽金元璧을 만나 학생층과의 접촉 방안을 논의하였고, 1월 27일 청년부 회원모집을 명목으로 김원벽‧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姜基 德‧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健과 김형기金炯機‧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송종의宋鍾宜‧경성전수학교 학생 이공후李公厚‧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朱翼‧연희전문학교 학생 윤화정尹和鼎 등 서울 시내 각 전문학교급 학 생대표들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85) 윤자영이 이들과 이어진 연결고리는 박희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서울 장로교파의 이갑성李甲成이었다. 2월 12일과 14일 2차에 걸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의 숙소에서 음악회 개최를 명목으로 모임이 열렸는데, 윤자영은 김원벽‧김형기‧김문진(세브란스의전)‧배동석(세브란 스의전)‧한위건 등과 함께 여기에 초청된 것이다.86) 그는 이 모임에 경 성전수학교 대표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운동의 정황 과 민족대표의 동향, 동경 유학생들의 활동상을 전해들은 그는 국내 학생 85)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2, 159-160쪽; 李萬烈, 「3‧1운동과 基督敎」, 《한국기독교와 역사》제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참조. 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