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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청송의 독립운동사 一英(윤소야)’라고 적고, 맨 아래편에 ‘정일영’이라 서명하듯이 기재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정일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 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Yun, Za Yen, 혹은 Chen Min이라 는 이름도 쓰였다.82) 그와 인연을 맺은 여인으로는 정실 아내와 또 다른 두 여인이 있었 던 것 같다. 서울을 오르내리던 무렵으로 짐작되는 1917년에 안동시내 옥동에 살던 안동권씨 권필향權苾香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후손이 없었고, 권씨 부인은 1944년에 작고했다. 다음으로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만난 석石씨라는 성을 가진 신여성이 있었다. 1930년 을 전후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동참했던 강문수姜文秀의 처가쪽 인물로 이화여전을 다닌 인물로 전해지지만,83) 뒷이야기에 대 해서는 알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가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렵에 그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근영李槿英이란 젊은 여성이 있 다. 함흥을 중심으로 지하공작을 벌이다가 대검거를 당한 1931년에 관 련자 명단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이근영은 나이가 22세, 본적은 함북 길 주군, 주소는 중국 간도 용정촌이라고 적혀 있었고, ‘윤자영의 처’라는 메모가 옆에 적혀 있었다. 근래에 윤자영의 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나 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는데, 이근영의 딸이 아닐까 추정하는 글이 있 다.84) 정리하자면, 윤자영에게 세 명의 여인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확 인되는 직계 후손은 없는 셈이다. 82) 외교통상부, 민원회신(러시아‧CIS과-766(2004.2.10) 83) 조카 윤동규 증언. 강문수의 아내는 石景德인데, 간호사로서 혁명활동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 위원회 활동에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였다(梶村秀樹‧姜德相, 現代史資料 29, 東京:原書房, 1972, 322쪽). 84)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