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page

21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며, 조부 윤계원尹啓遠은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냈고, 부친 윤만박尹晩鎛 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고 근래에 만든 족보에 적혀 있다. 청송지역에서 는 그의 집안에 대해 대대로 학문을 이어 온 가문이라 평가하고 있지만, 대성大姓은 아닌 듯하다. 그의 집은 중소지주 정도의 가세를 유지했다. 청 송지역은 본래 산골이라 대지주가 없었고, 청송에서 ‘심부자’로 불리는 집 도 사실상 2∼3천석에 지나지 않아, 다른 지역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대 지주도 아니었다. 더구나 윤자영의 집안은 그러한 청송에서도 ‘중소지주’ 였으므로, 집안 사정이 크게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윤자영을 서울로 유학시킬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고 여겨지고, 더구나 그가 당시 최 고학부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될 만한 부분이다. 그가 언제 서울로 상경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그가 상경한 시기 는 대개 1913년 전후로 생각된다.78) 집안에는 안동출신 사회주의운동가 78) 그가 작성한 「이력서」(러시아국립정치사회사문서보관소 소장, 임경석 교 수 발굴)에 처음 국내에서 민족운동에 참가한 시기를 1913년부터 1919년 으로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일단 그가 상경한 시기가 1913년을 전후한 무 렵부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윤자영 「제적등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