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page

제4장 3·1운동 / 217 제3절 서울의 3‧1운동과 윤자영 청송의 3‧1운동을 이야기하면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윤자영尹滋瑛이다. 비록 청송지역의 만세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3‧1운동사에서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의 족적을 남겼다. 그는 3‧1운동의 첫 단추를 끼웠던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윤자영이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할을 정리하 기에 앞서 출생과 성장부터 3‧1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의 흔적을 따 라 쫓아가 보자. 1. 출생과 성장 윤자영은 경상북도에서도 산 간오지인 청송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4년 9월 13일에,76) 청 송군 청송읍 금곡동金谷洞 749번 지에서 출생하였다.77) 그의 문 중은 파평윤씨 명은공파冥隱公派 76) 그의 출생시기는 1894년과 1896년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3‧1운동으로 검거되어 작성된 판결문이나 수형자카드, 그리고 제적등본에는 1894년 9월 13일생으로, 1932년에 모스크바로 유학하고자 중국공산당에 제출한 「이력 서」(이하 이력서)에는 1896년 10월 19일생으로 가각 다르다. 여기서는 제 적등본과 판결문을 따라 1894년생으로 정리한다. 77) 본적지에 대한 기록은 金谷洞 749번지(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결정서」, 1919. 8. 30;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 또는 1924년 일제경찰 정보문건에는 금 곡동 755번지,(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536쪽) 그리 고 월막리 180번지(제적등본)라는 기록이 있다. 월막리는 출생지가 아니 라 뒷날 이거한 곳이라 생각된다. < 윤자영 생가 터;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 749 >
223page

제3절 서울의 3.1운동과 윤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