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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청송의 독립운동사 다섯째, 청송 3‧1 만세운동은 평화적으로 전개되었다. 진보와 현서(화 목)시위 모두 주재소와 가까운 장터에서 일어났지만 기물을 파괴하는 등 의 격렬한 행동이 없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그러나 현서(화목) 시위 둘째 날인 27일, 일경은 시위군중들에게 발포를 하였다. 장터로 몰려가던 시위 군중을 막고 대치하던 중에 갑자기 발생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4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러나 시위 도중에 붙잡힌 사 람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2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마지막으로, 청송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3‧1 만세운동 때에는 적극적으 로 참여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 시기 의병 투쟁에서는 지방 유력 가문들이 연합하여 항일 투쟁에 공동 전선을 펼쳤으나 3‧1운동에서는 이 들이 대부분 침묵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함안조씨[조현욱‧조병국]와 경주김씨[김기수]를 제외하고는 유력 가문에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19세기말의 의병투쟁으로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 3‧1운동 때 미처 재충전되지 못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 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간교한 식민통치 방식에 기인하는 면도 크다고 생 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