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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 청송의 독립운동사 병합된 것을 분개하며, 독립된 한국의 정치 밑에서 살아보고 싶어 거사 하였다”라고 식민지 백성으로써 나라 잃은 설움과 국가의 소중함을 일 깨워 주고 있다. 6. 청송 3‧1만세운동의 특징 3월 하순에서 4월초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난 청송 3‧1 만세운동 은 8개 면 중 3개 면에서 일어났으며, 시위를 주도한 6명이 붙잡히면 서 끝이 났다. 특히 현서(화목) 시위 둘째 날인 27일에는 시위 군중들 이 장터로 몰려가던 중, 부근 천변에서 일경의 총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체 포된 6명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렇듯 청송 3‧ 1 만세운동은 비록 단기간에 걸쳐, 또 일부 지역에 편중하여 시위가 일어났지만 몇 가지 특징들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청송 3‧1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이끌어나간 주도세력은 기독교 인들과 지방의 양반 유림들이었다. 청송 인근 지역 이를테면, 안동‧영 덕‧의성 등지에서도 3‧1운동 계획단계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청송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시위를 확산시키 고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적극적인 투쟁양상은 현서(화목)시위의 유림 들과 농민들에게서 돋보인다. 이때 조현욱은 격문을 보내어서 동지를 규합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유림의 전통방식을 따랐다. 둘째, 청송 3‧1 만세운동의 주도인물들은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 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시위를 일으킨 경우라 하겠다. 이들은 중앙 조직으로부터 선언서를 전달받거나, 서울‧대구 등지의 유학생들이 만세 소식을 전달한 흔적도 보이지 않으며, 고종황제의 국장에 봉도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