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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 청송의 독립운동사 2) 주도인물의 만세운동 거사동기 및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 만세주도자의 거사동기 및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은 판결문의 신문조 서를 통해 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주도인물들의 거사동기는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진보에서 시위를 일으 킨 권태원과 현서(화목)시위를 주도한 신태휴‧이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권태원은 영덕 만세운동을 주도할 때 병곡의 정규하丁奎河에게 시위 계획을 논의하면서 민족자결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는 “프랑스강화회의 결과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하였고, 일본을 제외한 강국 (필자주; 전승국)의 위원 2명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되니 이때 우리의 독립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 한 그의 생각은 진보시위를 주도하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또 성흥선의 신문조서에서 권태원은 “하와이 조선인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세를 불러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민족자결주의로 인한 전후 세계적인 대세가 독립의 절대적인 호 기임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서(화목) 시위를 주도한 이형은 만국평화회의에서 결론이 난 ‘민족자결주의’라는 메시지가 우리민족에게 마치 복음처럼 들렸다고 하 였다. 그는 이 기회가 얼마나 반갑고 기뻤든지 “말이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 메마른 싹이 비를 만난 것과 같이 너무 기쁜 나머지 독립만세 를 불렀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신태휴도 ‘세계의 작은 나라가 독립 하는 대세에 즈음하여’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당연히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이렇듯 산골 오지에 위치한 청송에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의 뜨거운 조국애가 민족자결주의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만세운동으로 발현시켰던 것이다. 또한 김기수도 “이번 만세운동은 시기를 얻은 것으로써 한국이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