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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11 던 인물이다.72) 또한 이형은 일본에서 틈틈이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학생들에게 얼마간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로 인해 독 립의식도 함께 공유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전한다.73) 기독교인인 김기수 는 현서(화목)주변 지역과 연합시위를 도모했다는 점 등이 이를 입증하 고 있다. 조현욱은 일제통치 하에서 손상된 신분적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오기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가열시켰던 인물이다. 청송 만세운동의 양태는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일관한 듯하다. 시위 장소가 진보나 현서(화목) 모두 장터였고, 그곳과 잇닿아 주재소가 위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 말단기관인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에 몰려가서 투석‧파괴하는 격렬한 시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일 시위에서는 일본 경찰이 시위군중에 총격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기 도 하였다. 시위주도세력들이 재판 결과 받은 형량은 김기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2년형으로 높게 언도되었다. 이것은 민족대표 33인의 최고형이 3년이었 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중형임에 틀림없다.74) 형량은 어떻게 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어냈느냐 보다는 시위현장에서 얼마나 과격한 행동을 했 느냐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은 모두 최고 상급법원인 고등 법원까지 상소를 하였지만 기각되어 최종 1심과 같은 형량을 받게 되 었다. 72) 1967년 10월 10일 조병국 비석 제막식에서 석주의 조카되는 李運衡이 회고사 를 할 때 “조병국은 나와 협동학교 동기동창이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함(조병 국의 장남 조성대, 2004. 8. 12, 영천 하양감리교회에서). 73) 이형은 일본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에도 참가하였다고 증언함(이형의 손자 이석, 2004. 9. 23, 대구시 산격3동 거주). 74) 愼鏞廈,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 乙酉文化社, 1985,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