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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청송의 독립운동사 1937년에 편찬된 청기지靑己誌 에 의하면 “청송지역의 대표적 사림은 청송심씨靑松沈氏와 함안조씨咸安趙氏로써, 이들 성씨는 경상도지리지慶尙 道地理志 이래로 각각 청송과 진보를 대표하는 가문이며 청송지역의 토 착세력으로써 뿐 아니라 조선시대 이 지역 사림의 학풍을 사실상 주도하 는 가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 두 가문 외에 청송지역의 대표적 가문으로 영양남씨英陽南氏를 비롯해서 안동‧의성‧경주김씨, 진성‧ 가평‧경주이씨와 달성서씨, 아산장씨, 평산신씨 및 밀양‧경주박씨, 경주‧ 해주최씨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 안동권씨, 여흥민씨, 파평윤씨, 장수 ‧창원‧상주황씨, 청주‧동래정씨, 전주‧풍산유씨 등이 있었다.71) 이렇게 볼 때 현서(화목)만세운동의 주도세력은 청송사림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현욱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그 당시 양반 유림들 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던 격문을 보내어서 거사계획을 알리고 동지를 규 합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다만 3‧1 만세운동에서는 기독교인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웃 안동‧의성‧영덕 등지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초기 계획단계 에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는데, 청송에서도 주변지역의 활동상황과 거의 비슷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에서는 구세군 참위 인 권태원이, 현서(화목)에서는 조사인 김기수가 활동한 면에서 그러하 다. 이는 대한제국기 의병투쟁을 주도했던 세력과는 다른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만세주도세력들은 시위를 일으키기 전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에너 지가 충만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병국은 3‧ 1운동 전에 안동에 있 는 협동학교協東學校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우고 민족의식을 깨우쳐나갔 71) 薛錫圭, 「朝鮮後期 嶺南士林의 學風과 靑松士林의 學脈」, 청송의병의 활동과 성격 , 청송의병 107주년 기념학술회의, 청송군, 2003, 3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