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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09 먼저 25일에 일어난 진보시위의 주도자부터 살펴보겠다. 진보시위는 전 적으로 권태원이 단독으로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구세군 참위가 되기 전부터 낙평 구세군교회의 지영인 진보 이촌교회에 교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류와 친분을 쌓은 경력을 지녔다. 한학에 도 조예가 깊을 뿐 아니라 평소 신문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스크 랩을 하는 습관이 있어 1차 대전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당시의 국제정세 에도 정통했던 것으로 확인된다.70) 더구나 구세군 참위라는 위치는 종교 조직인 중앙 본영과도 일정한 교 류가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다방면에 박학하면서도 사회참여에 적극성을 띤 성격의 소유자로 보 여진다. 이러한 그의 성품이 평소 인적기반을 구축해 놓은 것으로 판단한 진 보 이촌교회에서 영덕 만세운동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래 서 진보 만세시위는 권태원이 종교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의 열기를 주변 지역으로 계속 확산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드러낸 시위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26일과 27일 이틀간에 걸쳐 일어난 현서(화목)장터 만세운동 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간 인물들을 살펴보면, 조현욱‧신태휴‧조병국‧이 형‧김기수 등 다섯 명으로 압축된다. 이들은 모두 현서면 출신이며, 조현 욱‧신태휴‧조병국은 일제기록에 양반으로 분류된 인물들이다. 일제는 재 판기록인 「판결문判決文」에서 이들의 신분을 모두 농업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일제헌병경찰기록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에서는 ‘양반’으로 표기하여 신분을 엿볼 수 있다. 70) 권태원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3‧1운동 이후에 병곡 송천과 영덕종고 에서 한문교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래서 택호를 ‘교사댁’으로 불렀다고 증 언한다(이경인씨 증언-권태원의 사위, 2004. 8. 20 영덕읍 거주, 79세). 증인 성흥선의 심문조서 중에 권태원은 “조선인이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만국강화회의에 참여하였다”라고 시위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한 기록이「判決文」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