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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 청송의 독립운동사 각 면에서도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 4월 6일에는 대대 적인 만세시위를 벌인 것으로 나와 있다. 그 날은 평소와 달리, 거리는 인적이 끊어진 듯 적막감이 감돌다가 오후 5시 경 돌연 수천 군중이 태 극기를 들고 대오를 갖춰 시가지를 행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위로 인 해 수십 명이 붙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68) 위의 내용대로라면 청송(면)의 만세운동은 청송군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시위 군중의 숫자 면에서도 대규모임에 틀림없다. 또 시위방 법 면에서도 봉화를 올려 각 면과 연계를 도모한 거군적인 성격을 띈 조 직적인 시위였다. 그러나 시위의 규모와는 달리 만세시위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단편적이다. 더구나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전 전혀 확인할 수 없으며, 주동 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필자는 청송지역에서 전해지는 증언을 통해 접근해 보고자 시 도하였다.69) 물론 증언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근거로 채택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청송의 만세운동은 시위 기간‧규모‧방법 면에 서 군내 다른 지역 만세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드러졌던 만 큼 비록 재판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수십 명이 만세시위로 붙잡혔다면 사 람들 사이에 회자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상 황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없어 증언을 통한 만세운동의 실체 규명에도 어 려움이 있었다. 68) 李炳憲 編著, 三‧一運動秘史 , 三‧一同志會, 1966, 925쪽. 청송(면) 삼일 만세운동에 관한 기록은 위의 책 이외, 두 가지 더 있다. 이용락 편저, 三‧一運動實錄 (1969년)과《大邱每日新聞》(1982년 4월 22일 자, ‘抗日獨立運動史’ 특집기사) 기사인데 이들 내용 모두 三‧一運動秘史 를 참조 하여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 측 기록은 없고, 재판기록 또한 나와 있 지 않다. 69) 증언 1; 蔡宗植씨(청송군 파천면 관리 도찌골 거주, 75세, 2004. 8. 10). 증언 2; 蔣必燦씨(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거주, 2004. 8. 10). 증언 3; 박명준씨(청송군 청송읍 사법서사, 200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