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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 청송의 독립운동사 김만천이라고 하는 순사보가 있었는데, 그가 현서(화목) 장터 만세시위 때 자기가 소지하고 있던 총을 부러뜨리고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는 내용이다.64) 이 일로 인해 그는 체포되었으나 조현욱과 함께 의성에 있는 헌병분견대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탈출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일과 관 련하여 다시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7여 년 뒤에 그는 안덕면장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65) 이 사건에 대한 일제 측의 공식 기록은 없다. 그리고 의성 헌병분견소 에서 병력이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일제 경찰의 말 단직에 있는 순사보가 일제 식민지 통치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만세 시위에 합류하여 민족의 독립운동 대열로 돌아선 사람이 어떻게 처벌을 받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또한 만세사건 이후 몇 년간의 행적도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438쪽에 “이 의거에서 군중들은 총 1자루를 부수어 버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65) 李相龍 編著, 靑松 人物錄 , 가람출판사, 1982, 31-34쪽; 김경호씨 증언 (김만천의 女, 88세, 2004. 8. 13, 안덕면 덕성리 자택). 김만천에 대한 평가는 청송지역에서 극명하게 둘로 나뉜다. 만세시위 주 동자들의 후손(조현욱의 손자 조덕호, 조병국의 자 조성대)과 김만천의 자 김기영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현서(화목) 면내 노인들의 주장도 그 러하다. 먼저, 김만천이 만세시위 때 총을 부러뜨렸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 하고 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다. 순사보의 위치 에서 상부나 상관의 허락 없이 총을 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더군 다나 총을 부러뜨렸다는 것은 전후 사정을 막론하고 일제 경찰의 입장에 선 용인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김만천이 총을 부러뜨린 이유에 대해 “시위 군중에게 실탄 발사를 하게 되면 경찰 상부로부터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되는데,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먼저 일본 순사의 입장에서 총 을 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다”라는 증언(2004. 8. 13, 안덕 면 복동 노인회안덕면분회 경로당에서 남정식씨, 88세)과 “화목장터의 주 재소 부근에 모여든 시위대들이 일경의 공포 한발에 혼비백산 하니 이럴 수가 있나 하며 자기 총을 부수고 평소에 억눌러 왔던 민족의 양심으로 선회하여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라는 상반된 증언(위의 장소, 박화진, 78 세)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