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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01 다. 이 과정에서 조현욱과 신태휴 등 주동자 2명은 체포, 연행되었다. 이 날의 만세운동에는 조현욱‧신태휴‧조병국 뿐 아니라 사촌동에 사는 이형 李瀅도 주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화목동에 사는 이기李琪와 영천사람 김기용金基用도 시위에 참여한 인물로 기록에 나온다.59) 그런데 현서 구산동의 김기수가 3월 10일경 처음 만세운동에 대한 논 의를 하기 위해 백자동의 서당 훈장인 이규백을 찾아갔을 때 그로부터 현서(화목)장터에서 23일 경 만세운동이 계획되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되 었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세운동이 논의되었고 또한 준비 중이라는 말에 힘을 얻은 그는 만세시위를 위한 비밀스럽고 발빠른 행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김기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는지를 알려주 는 자료는 없다. 다만 조현욱과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규백과 조현욱은 서당 훈장과 지방 유생으로써 만 세운동에 대해 충분한 공감대를 공유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록 초기 계획 단계에서는 서로 시위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았지만 김 기수는 결국 이들과 연합하여 현서(화목)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 게 된다. 2) 2차 시위 26일 현서(화목) 장터에서의 만세 운동은 주동자 조현욱‧신태휴가 붙잡 히고, 일경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 군중이 강제 해산되면서 끝이 났다. 이 때 체포를 면한 조병국은 일단 귀가한 후, 시위를 계속하기 위해 마을 사 람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동지 규합에 나섰다. 다음날 27일, 조병국은 동민 1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현서(화목) 59)《大邱每日新聞》1982년 4월 22일자, ‘抗日獨立運動史’ 특집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