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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 당시 진보 세장동 사람들은 25리의 길을 걸어서 임동장까지 왕래하였 다.56) 뿐만 아니라 진보는 영덕에서 생산되는 어물이 임동으로 운송되는 길목이어서 상업자본이 형성된 임동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곳이기 도 하다. 이것이 진보 세장동 사람들이 임동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 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이다. 3. 현서(화목) 장터 만세운동 진보장터에서의 만세운동 이 있었던 그 다음날인 26일, 현서(화목)에서도 또 한 차 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곳에서의 거사는 사전 계획 이나 주동 인물 및 시위 군 중 등 여러 면에서 진보와의 연계된 사실을 찾을 수 없는 별도의 만세시위였다. 청송 만세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서(화목)시위는 27일까지 이틀간이나 계속되 었다. 그리고 시위의 강도도 격렬했기 때문에 일경의 발포로 부상자도 속출 했다. 현서시위는 조현욱趙炫郁이 지도한 26일의 1차 시위와 그가 체포된 뒤, 조병국趙柄國이 주도한 2차 시위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56) 유대철 증언(청송군 진보면 세장리 거주, 2004. 9. 6). < 고등경찰요사 에 기록된 현서면 만세운동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