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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197 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가 24일 진보에 와서 그 다음날 곧바로 시위 대열 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맥이 사전에 구축된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보 3‧1 만세운동은 주동자 권태원이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52) 더구나 시위 주모자인 권태원만이 체포되어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교인 30여명의 신원도 파악할 수 없다. 다 만 그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는데, 「구세군 이촌 영문일지」가 그것이다.53) 이 자료에는 당시의 교인 몇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진보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보사람으로서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사람도 눈에 띈다. 세장동에 사는 안봉익安鳳翼(24세)과 권용 이權龍伊(21세)가 그들이다. 이들은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챗거리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500여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였다. 이들은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54) 당시 챗거리 장은 경북북부지역의 어魚‧염鹽 집산지로서 도‧소매시장이 크게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마방馬房이라는 상 업조직을 통해 상업자본을 형성하였고, 인근 6거리로 뻗어 있는 도로망을 이용하여 활발한 상업활동을 펼쳤던 상업의 요충지였다.55) 그렇다보니 52) 권태원은 영해 영덕 의거의 주동인물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된다(《大邱每 日新聞》1982년 4월 22일자, 특집기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하), 1971, 437쪽). 53) 「 구세군 진보 이촌 영문일지」는 교회설립 후 일지 형식으로 계속 작성하여 오 다가 중간에 분실되었던 것을 1973년 1월 29일 참령 박성규가 그 당시 正 校인 徐基碩, 前 正校 金承漢, 동네 노인 裵木星 등의 자문을 받아 재 기록 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는 교회 설립과정과 설립연도 및 초대교인 등이 기 록되어 있는데, 초대 ‘급우’로 표현된 교인은 정교 배현용‧재무 이중화‧김현 기‧권을산‧이용호 등으로 나와 있다. 담임사관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인 계되는 교회운영의 기초자료로써 현재까지 계속 작성되고 있다. 54) 「判決文」(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348쪽). 55) 金元錫, 「안동의 3‧1운동」, 안동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