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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 청송의 독립운동사 부터 21일까지 3일동안 영덕지역(영해‧영덕‧병곡‧지품)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3월 24일 진보 이촌교회로 몸을 옮긴다. 그가 이촌교회로 몸을 옮긴 것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4년 전부터 이미 이촌교회와 교류 가 있었기 때문이다.48) 이촌교회는 1915년 6월, 교회 내에 ‘영신의숙永信 義塾’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49) 이때 권태원이 교사로 초 빙된 적이 있다.50) 1910년 영덕 지품에 낙평 구세군 영문이 설치되었고, 인근지역으로 선교활동을 폭을 넓혀갈 당시 권태원은 이 영문에 재직하 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이 학교의 교사로 초빙된 것은 구세군의 선교와 교육활동 지원이라는 성격이 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촌교 회와 인적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권태원은 영덕지역 만세운동의 열기를 고스란히 진보로 옮기고자 하였으며,51) 마침내 이촌 교민들과 이 48) 「判決文」에 나오는 권태원의 검사 심문조서 내용은 “나는 지금부터 4년 전 나 의 향촌 구세군 지영(支營)의 교사로 고빙되어”라고 나온다(독립운동사편찬위 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3‧1운동 재판기록, 1417쪽). 아울러 「구세군 이 촌 영문 일지」에 구세군 이촌 영문의 설립당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김진휴(영양 석보 화매 거주)가 낙평 구세군교회에서 전도를 받고 청송 진 보 이촌에 사는 처남 이용호 집에 낙평 구세군 이촌 분영으로 기도실을 세운 후, 1913년 10월 5일 낙평 지영에서 독립하여 이촌 영문으로 출발하였다”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로 볼 때 영덕‧지품 구세군 낙평 영문과 청송 진 보 이촌 영문과는 태생적으로 본영과 지영의 위상에 포함되어질 수밖에 없었 으리라 생각되며 교류 또한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9) 권태원 자신이 생전에 작성한 ‘이력서’ 에 의하면 “1914년∼1916년 청송 진 보 이촌 永信義塾 교사”로 기록되어 있다(권태원의 사위 이경인씨가 소장- 영덕 거주, 79세). 권태원이 진보 이촌 구세군교회에서 3‧1 운동 전에 교사 생활을 했다는 기록은 「判決文」과 「구세군 이촌 영문 일지」, ‘이력서’ 등의 3가지 자료에서 일치하고 있다. 50) 구세군 이촌 영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구세군 진보 이촌 영문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1915년 6월 이촌 영문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낙평 영문 출신 권 태원을 교사로 교육사업과 전도사업에 크게 활약함”이라고 쓰여 있다. 51) 권태원의 검사 심문조서에 “청송군 진보면 진보동(이촌동의 잘못된 표기인 듯; 필자 주)에는 구세군의 중앙기구가 있으므로 나는 동소의 구세군의 병사 및 부근의 사람들과 만세를 부르려고 생각하고 음 2월 23일(양력 3월 24일; 필자 주) 동소로 가서 4∼50명을 규합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공술했다.